황우석 가문의 선조,박물관 유물 공개되어 눈길...
|
황씨 가문의 족보가 전시된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현장 탐방
| |
취재국, sang0015@hanmail.net |
등록일: 2006-10-09 오후 5:06:42 | |
황씨 종친회 황민환 회장의 증언에 의하면 “경복궁 내에 민속박물관에 황씨 가문의 유물이 안치되었다”고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본지 취재팀과 발행인인 백승원(5.31 서울시장 후보)대표 그리고 황필주 선생과 함께 경복궁 내 국립민속박물관에 있는 유물을 탐방하였다.(9월 24일 이후 3회 탐방)
국립민속 박물관 관계자에 전언에 의하면 “우리나라 가문 중에서 유일하게 창원 황씨의 족보가 전시”되었다고 한다.창원 황씨의 유물이 세상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황우석 박사의 직계 선조이기 때문이다. 창원 황씨 유물이 전시되었다고 할지라도 황우석 박사의 직계 조상인지 아는 이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이에 본지 취재팀은 특집으로 민속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
| | 추포 선생의 영정과 유물들이 전시된 모습(황우석 박사의 12대 선조) | | 황필주 선생과 백승원 대표가 국립민속박물관을 관람하고 있는 시민에게 다가가 “이 곳에 전시된 유물의 직계 후손이 황우석 박사님이다”라고 하자 많은 시민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어떤 시민은 “세계적인 과학자를 배출한 애국자 집안은 조상 내력이었다”고 속삭였으며, 많은 시민들이 황필주 선생과 백승원 대표가 대화하는 장소에 몰려들어 뜨거운 관심과 지지를 보냈다.
이 곳에 유물이 전시된 배경은 “1996년 창원황씨 추포가(秋浦家) 종손 황용주(黃龍周)와 아술당가(蛾述堂家) 종손 황민환(黃旻煥)이 중심이 되어 부여 일대에 거주하던 창원황씨의 고문서와 전적류 1006여 점을 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기증 유물들은 영정, 호패, 옥관자 등 기타 유품과 교지, 교서, 유서, 간찰류, 분재기, 호적문서 등을 포함하는 고문서 및 전적류로서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풍부하게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들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한다.
황씨 가문의 유물을 기증한 가족의 일화도 내려온다.일제 시대 때에 일본인이 매매하라 하고 압력을 넣어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최근에도 가세가 어려워도 한 푼 받지 않고 국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황용주라는 분은 황우석 박사가 큰 재목으로 성장할 것을 예견하여 어린 시절 황우석 박사를 가르치는데 많은 후원을 하였다고 한다. 황우석 가문의 역사는 충절의 집안이며 그 정신이 현 시대까지 그대로 전해저 내려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원 황씨 유물 중에서 가장 눈에 뛰는 것은 문민공 황신영정(黃愼影幀)이다.견본채색(絹本彩色) 기법으로 그렸으며 교의에 앉아 있는 황신(黃愼)의 전신상을 그렸다. 황신(1562∼1617)은 자(字)가 사숙(思叔)이며 호는 추포(秋浦)이기 때문에 “추포선생”으로 불리운다.가장 커다란 공적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부임하여 전란을 수습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으로 위성공신 2등에 회원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삼도 격문을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라고 한다. |
| | 국민적영웅으로 떠올랐던 황우석 박사 | | 황민환 종손의 전언과 가문의 사료를 통해 추포선생의 일생을 조명하면 다음과 같다.
추포선생이 10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가세가 기울었지만 모부인은 길삼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아들을 가르첬다고 한다. 21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우계 성혼에게서 수업받았으며, 27세 때에 율곡 이이에게 도학을 받고 알성문과에 수석급제까지 하였다.이후 성균관 학관에 이어,북도병마평사를 거쳐 주요 요직을 두루 섭렴하였다.주변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모함 때문에 좌천되기도 하였으며 정여립과 친분이 있다는 죄목으로 곤혹을 치루었다.
임진왜란이 정전되어 휴전협상을 벌일 때에 청나라 대표 심유경과 더불어 조선 대표로 황신이 가게 되었다.왜영에 머물면서 적정을 살피고 시세를 판단하는 것이 탁월하여 조정과 국민의 신뢰하였다고 한다. |
| | 아술당가(蛾述堂家) 종손 황민환(黃旻煥)의 모습(황씨 종친회 회장) | | 통신사로 왜로 건너갈 때에 배가 풍랑을 만나 좌초될 위기에 처하자 서해문(誓海文)을 써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그 이후 바다가 잠잠하여 무사히 건너간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막부에 도착하여 일본 관백인 풍신수길과 협상하려 했으나, 조선 사신의 관직이 낮고 왕자를 보내지 않는 등, 여러 트집을 잡아 협상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사신을 구류한다고 하자, 조선 사신단 부하들이 심유경에 가서 구원을 요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내가 조국을 떠나 올 때에 세 가지 계획을 정했는데 첫째는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심유경과 함께 돌아 올 것이오.둘째로는 협상이 되지 않고 나를 구류한다면 십년이라도 그 고초를 달게 받을 것이오. 셋째로는 왜인이 포학을 가하여 살육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워 할바 아니오 기꺼히 목숨을 바치겠다. ”그리고 일본측이 무리한 주장을 하자 하나도 양보하지 않고 엄연한 자세로 임하고 시종불굴하니 일본측도 황신의 충직정강(忠直正剛)함에 감탄하였다.
휴전 협상이 결렬되고 재침할 것을 예견하고 조선에게 대비하게 충언을 드렸으며 이 이후 전라도감찰사에 되었는데 그에게 지원된 병력은 겨우 100명에 군량미도 거의 지급되지 않자, 스스로 패잔병을 모으고 의병과 합세하여 난적을 소탕하고 실지를 회복하였다
추포 선생의 자애로운 인품을 알 수 있는 글도 전시되었는데 자손들에게 쓰는 유서 내용 ”우리 조상님을 생각해 보건데 고조 이하는 모두 수명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였으며 40세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도 있다. 내가 지금 나이가 오십이 넘었고 지위는 1품을 지냈으며 바라던 것은 아니나 훈적에 올라 이미 분수가 지나첬으니 지금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 너희들이 이러한 뜻을 알면 좋겠다.나는 이 궁벽한 곳에 홀몸으로 왔고,너희들은 또한 멀리 수백리 밖에 있다.늙고 병들어 점차 고질이 되어가는 것을 스스로 느끼니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되어 내 뜻이 전해지지 않을까 두렵구나. 이에 내 마음 속의 간략하게 써서 너희들에게 주니 잘 알거라.만약 집안에 번잡한 일이 닥치거든 어린 것들을 사랑해 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거라.너 일호(아들)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이에 급하게 쓰노니 모두 잘 알 지어다.” 이 그대로 전시되었다.
이 유서를 받은 충렬공 황일호 선생(황신의 아들)의 삶을 간단히 살펴본다면,”호는 지소이며 임천군수를 역임한 후에 대과에 등과하고 사헌부 장령이 되어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독전어사로써 위훈했다. 그리고 대를 이어 충절을 지킨 일화는 다음과 같다.병자호란의 수치를 씻으려고 명나라와 합세하여 청나라를 치려고 밀서를 보냈으나 청나라 군인에게 발각되어,임금이 보낸 사실이 발각되어 그 배후가 임금이라는 것이 밝혀지려고 하자,인조임금을 대신하여 단독범이라고 청나라 진상위원회에게 허위자백하여 홀로 참수당해 순국하였다. 인조임금이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임금이 직접 제사를 지낼 정도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황민환 회장의 인터뷰 중에 “창원 황씨 가문의 내력은 충절의 집안이며, 모함과 질시를 받아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후대에 억울함이 밝혀졌으며,황우석 박사님도 대한민국의 위대한 애국자입니다.제가 줄기세포에 대해 전문적 식견은 없지만 황우석박사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라는 것은 조상 내력 자체로 알 수 있다”라고 강변했다.
한편 황필주 선생과 동행한 백승원 대표는 “황필주 선생의 초빙으로 민속박물관에 동행하여 좋은 민생탐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이곳에 구경 온 일반 시민들과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게이트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으며,대체적으로 국제적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라는 것에 공감을 하였습니다.황우석 박사의 진실이 밝혀지고,생명윤리법을 개정하여 황우석 박사도 줄기세포 연구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 좋겠다는 주장에 많은 박수와 지지를 보냈습니다.”라고 동행 관람의 소감을 밝혔다.
황우석 박사는 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는 배반포 기술을 인정받으면서도, 논문 데이터의 오류와 연구비 횡령 의혹때문에 서울대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황우석 박사의 연구재개와 재기를 바라고 있는 시점에서 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된 황우석 가문의 선조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향후에 많은 국민적 관심사로 떠 오를 전망이다.
황우석 지지연대는 황우석 사건을 ”국제적으로 다국적자본주의 세력의 모함과 음모의 산물이며, 국내적으로 매국세력의 권력 카르텔의 희생양으로 되었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여에서 많은 행사를 벌이고 있다.이러한 연장선에서 부여에서 행사를 할 때마다 대거 참여하고 있다. 올해 들어와서 3번이나 부여 행사에 전국에서 모여든 황지지 연대가 참여한 적이 있다.지난 4월 8일 부여집회와 7월 부여 서동연꽃축제 그리고 9월 백제문화제가 참석이였다.3번 행사를 통해 부여군민은 황우석 박사님의 진실을 많이 알게되었으며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라고 한다.
황우석 가문의 선조가 국립박물관에 안치되었지만, 일반 국민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가운데 황필주 선생과 황씨종친회가 이 사실을 황지지 연대에 알려왔다.작은 사건이지만 많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본다.
황우석 박사! 그는 진정한 대한민국의 영웅이며 애국심의 원천기술은 조상의 내력에서 비롯된 것이다.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그의 재기를 바라고 있으며 전국에 산재한 황우석 지지연대가 아직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의 영웅 황우석 박사는 죽지 않을 것이며 조만간 부활할 것이라 믿는다.황우석 박사는 충절가문의 부활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증명하는 계기가 이번 취재를 통해 들어났다. [편집부]
|
|
황신 [黃愼, 1560~1617]
본관 창원(昌原). 자 사숙(思叔). 호 추포(秋浦). 시호 문민(文敏).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88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감찰(監察) 등을 지내고 호조 •병조의 좌랑을 역임했다. 1589년 정언(正言)으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때 대신들이 직언하지 않음을 논박했다가 이듬해 고산현감(高山縣監)에 좌천되었다. 1591년 정철(鄭澈)의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다가 1592년 재기용되어 지평(持平)으로 세자(世子:光海君)를 따라 남하, 체찰사(體察使)의 종사관을 지냈다.
1596년 통신사가 되어 명사(明使)와 함께 일본에 왕래, 화의가 결렬된 뒤 명나라의 내원(來援)을 얻는 데 힘쓰고, 그 후 위유사(慰諭使)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2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간 사이에 정인홍(鄭仁弘)의 탄핵을 받고 삭직당해 강화(江華)에 돌아갔다가 1610년(광해군 2) 호조참관으로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와서 공조 •호조의 판서를 지냈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옹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인조(仁祖) 초에 우의정이 추증되고, 부여 창강서원(滄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추포집(秋浦集)》 《대학강어(大學講語)》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등이 있다. |
| |
|
|
|
|
IP: 59.14.24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