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공 (휘)백천장선생
0 5,240 11-08-13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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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장선생 묘(경기 기념물 86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백천장선생 묘역 외부는 철책으로 둘러져 있었으며, 묘역 입구도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철책 밖에서 신도비를 찍고나서 어디 들어갈 틈이 없나하고 아래쪽으로 내려가 보니 또 다른 입구가 있었는데, 자물쇠 줄을 헐렁하게 묶어 놓아서 중간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
▲ 묘역 출입구(윗편) 전경 |
▲ 묘역 출입구(아랫편) 전경. 틈새로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
백천장선생 묘역은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굉장히 넓고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묘역 아래 좌우로는 재실이 있으며, 중앙에는 큰 연못이 있습니다. 묘역내 석물 중에 당시의 문인석 한 쌍과 작은 장명등이 있으며, 다른 석물은 근래에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
▲ 아래 출입구를 들어서면 좌측에 서 있는 비석 |
▲ 출입구 방향에서 바라 본 묘역 전경 |
고려말기의 문신이자 수원백씨의 시조인 송계 백우경의 후손 백천장의 묘로 경기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었다. 백천장의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호는 묵와(默窩)이며 문하평장사를 지낸 백원정(白元貞)의 아들이다. |
▲ 묘역 아랫편에 있는 연못 전경 |
▲ 묘역 좌측에 있는 재실 |
진사로 문과에 등과한 후 원나라에 유학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받고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을 역임했다. 연로하여 귀국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 평장사(平章事)를 제수받고 수성백에 봉해졌다. 그 후 수원에 거주하다 85세에 별세하였다. |
부음을 들은 고려 충선왕이 심히 애도하여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시호를 문익(文益)이라 하였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화산으로 옮길 때 10리 이내 민가의 산소는 이장하게 했으나 이 묘는 조정에서 명하여 그대로 보존하게 하였다. |
▲ 백천장선생 묘역내 석물 ▼ |
묘역 전방 50여m 지점에는 약 5,000여평으로 추정되는 연못이 있고 전방 멀리 고금산이 안산을 이루고 있다. 봉분 뒤편에 사성(莎城)을 높게 두었고 봉분 앞에는 상석이 배치되어 있다. 높이 180㎝, 직경 430㎝의 봉분은 원형으로 호석을 둘렀으며 봉분의 우측에는 1813년(순조 13) 세운 구 묘비와 최근에 새로 건립한 묘비가 나란히 있다. |
최근에 새로 묘역을 정비하면서 각종 석물을 갖추었는데 옛 석물 중에서 장명등과 문인석 1쌍이 남아있다. 고려 말의 것으로 추정되는 장명등은 총높이 102㎝로 사각의 개석을 얹었고 상대석 전후에 화창(火窓)을 내었다. 역시 고려말의 것으로 보이는 문인석은 총높이 139㎝로 복두를 쓰고 공복을 입었으며 홀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
▲ 백천장선생 묘역에서 내려다 본 좌우중앙 전경 |
백천장선생 묘역 안내도 |
백천장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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